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250·251號
발행연도
2006.9
수록면
253 - 285 (33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영산전은 석가모니불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다는 전설을 기념하기 위한 공간으로 〈영산회상도〉와 〈팔상도〉가 봉안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통도사 영산전은 18세기 초에 중창되고 1734년 〈영산회상도〉가, 1775년 〈팔상도〉가 봉안되었다는 점 외에 중창 당시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어떠한 단서도 남아 있지 않다.
18세기 이후에 제작된 팔상도의 도상들이 『석씨원류응화사적』에서 연유되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먼저 상벽에 그려진 25장면의 불전 설화와 내용을 비교, 양자 간에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양자의 도상들은 전혀 중복되지 않았으며, 25장면의 벽화 중에 ‘천인헌초’ 외에는 모두 성도 이후의 사적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천인헌초’는 다른 팔상도들에는 표현되지만 통도사 팔상도에서는 표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누락된 것을 보완하기 위해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나머지들도 성도 이후 열반까지의 석가모니불의 사적이 3-5장면밖에 표현되지 않는 우리나라 팔상도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한다는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고 이 벽화들이 제작될 당시에 화가가 현재 팔상도의 내용을 참조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으며, 『석씨원류응화사적』벽화들은 팔상도가 봉안된 이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파악하였다.
상벽에 그려진 불전 벽화들의 내용은 석가모니불이 신이를 보여 중생을 제도하거나 자식, 며느리의 도리를 일깨우는 교화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신심을 갖고 불교에 귀의하거나 보시를 하면 신분에 관계없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주제들로 불교를 대중들에게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포벽의 승려들과 관련된 벽화들도 석가모니불이 설법한 내용이 후대에 어떻게 수호, 전파되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전각 내부를 화려하게 장엄할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처럼 석가모니불과 여러 승려들의 행적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석씨원류응화사적』이라는 판화집이 대단히 유용했을 것이며 그 유통이 이러한 다양한 벽화를 제작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들 벽화의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1912년 사내에 전하는 기존 기록들을 모아 정리한 「각법당초중창기념」에 언급된 간략한 기록과 「영산전중수겸단확기」라는 현판 기록을 통해 1792년에 指演이 직접 참여했거나 그의 감독하에 영산전 중수단청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다. 지연이 18세기 말 통도사에서 제작되는 대규모 불화 제작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화원이라는 점에서 좁은 의미의 단청이 아니라 벽화 제작까지 포함하는 불사의 책임자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석씨원류응화사적』 관련 포벽화들은 팔상도와의 비교를 통해 팔상도가 봉안된 1775년 이후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다시 1734년, 1775년, 1792년이라는 영산전과 관련된 절대연대들을 기준으로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불화들과의 양식 비교를 통하여 「영산전중수겸단확기」의 기록대로 1792년 指演에 의하여 그려졌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불보사찰 통도사에서 석가모니불의 위상은 다른 어떤 부처보다도 의미 있는 존재였을 것이다. 이러한 위상이 석가모니불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했다는 전설을 구현한 영산전의 규모와 내부 장식을 다른 사찰의 그것과 차별되게 만들게 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측벽인 동벽에 불단을 마련하고 입구인 남벽 외에 북벽에도 작은 출입문을 낸 구조는 넓은 공간을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1775년 당시의 건축 구조와 무관하게 팔상도가 제작, 북벽의 출입문 위로 봉안됨에 따라 법당으로서의 기능은 축소되었고, 다시 1792년 중창불사시 벽화가 그려지면서 현재와 같은 구조로 완성된 것으로 생각한다. 대부분의 다른 사찰에서처럼 대웅전을 보완해 주는 부속 전각이 아니라 석가모니불의 상주처이자 『법화경』을 설하는 영산회상의 장소인 독립된 공간으로 한층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18세기 경제적인 안정에 힘입어 양난으로 인해 파괴된 전각들이 중창될 때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불의 다양한 행적을 알리고 고통 받는 이들을 영산회상에 참여케 한다는 염원의 발현이며, 그 결과물이 현재의 영산전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통도사 영산전이 갖는 불교 신앙적ㆍ미술사적 의의라 할 것이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석씨원류응화사적』과 팔상도의 도상
Ⅲ. 『석씨원류응화사적』벽화의 내용 및 표현의 특징
Ⅳ. 벽화의 편년 및 의의
Ⅴ. 맺음말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09-609-014735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