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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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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문화사학회 문화사학 文化史學 第18號
발행연도
2002.12
수록면
89 - 104 (1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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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 봉황리마애불ㆍ보살상군은 600년을 전후로 조성되었으며, 同時代나 그 이전의 고구려 금동불에서 볼 수 있는 양식적 특징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조각 솜씨로 보아 이 불상군을 만들었던 장인은 고구려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불상군에 대한 연구는 양식적인 계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누가 왜 어떤 목적으로 마애불을 조성하였는가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살피지 못했다.
필자는 이 마애불이 출현하였던 원인을 惠亮法師의 신라 망명과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혜량법사는 고구려 숭려였지만 거칠부의 주선으로 신라에 망명하여 황룡사 주지가 되었다. 진홍왕대의 불교정책을 주도하고, 신라 불교를 국가적 성격의 불교로 정착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로 보인다. 혜량과 그의 무리들이 망명한 이유는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망명한 시기 및 政亂을 망명 이유로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540년대의 고구려의 왕위계승전이 직접적인 이유인 듯하다. 신라에서는 이들 중 일부는 왕경에 안치하였지만 대부분은 국원소경에 안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봉황리마애불ㆍ보살상군이 바로 이들에 의해서 제작되어 고구려의 금동불 양식이 강하게 반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애불상군의 조성 목적은 국원소경의 설치 목적과도 서로 통하는 것이다. 국원소경은 6세기 중반신라의 북진을 지원하는 배후 거점으로 설치된 신도시였다. 군사ㆍ행정ㆍ경제 등 각 분야에 있어서 전문적인 능력을 가진 왕경인, 가야인, 고구려인 등 출신 배경이 다른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도시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었다. 국원소경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각 구성원간의 조화가 요구되었다, 이 불상군은 바로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국원소경인들의 정신세계를 통합하기 위한 목적에서 국가의 주도로 조성된 것이다. 따라서 불상의 조성은 신라 왕실의 발원에서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 국원 소경의 귀족층도 참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조각을 직접 담당한 것은 고구려 유민들로 보인다.

목차

요약
Ⅰ. 머리말
Ⅱ. 樣式的 特徵
Ⅲ. 造成 主體
Ⅳ. 造成 目的
Ⅴ. 맺는말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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